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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이런 일이
고병국 2019.4.21 조회 199

                               행7:54-60“어찌.이런 일이

                                                               인사합시다. 축복합니다.

본문 이야기

사도행전에는 초대교회의 인물들이 비교적 많이 등장한다. 이런 인물들 중에는 기독교 역사상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많은 도전과 교훈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스데반이다. 스데반은 최초의 직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이다. 스데반이 회심한 나이가 25세였다. 박해의 첫 순교자가 될 때의 나이는 33세 정도였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다. 유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주로 로마와 그리스 문화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은 오순절 축제에 맞춰 예루살렘에 여행(순례)을 왔을 때였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회심을 하였다. 스데반은 수 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예루살렘에 머물기 위해 고향의 가족과 친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였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성내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365개의 회당 중 한 곳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 회당은 해방된 자의 회당이라고 불렀다. 이 회당은 구레네, 알렉산더, 소아시아, 그리고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곳으로서, 당시 다소 사람 사울도 이 회당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 스데반은 이 회당에 모인 헬라파 유대인들과 논쟁하였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논쟁으로 이기길수 없게 되자, 몇몇 사람들이 비밀리에 공모하여 거짓 협의를 씌웠다. 그것은 성전모독죄이다. 결국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회부되었고, 공의회는 그를 사형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한다.(산헤드린 의회는 오직 한 가지 소송에 대해서만 사형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피고에게 성전모독죄가 인정될 때이다.)

 

보통은 사람들이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있다면, 선택하는 길은, 하나는 도망을 간다. 말이 돌아 맞는 거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 번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또 하나는 어떻게 하든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잘못했다. 실수이다. 고 시인하면 된다.

 

어쩌라고 저렇게 한단 말인가?

그런데 스데반은 어떤가? 도망가지도 않았고, 자신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고스란히 온갖 고통을 다 당하고 돌아 맞아 서서히 죽어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이점이 우리들의 마음에 왜,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사람의 목숨이 둘도 아닌데, 꽃다운 청춘이라고 할 만큼 젊디젊은 33세가 아닌가? 여러분 같으면 과연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남들이 모르는 그만의 비밀이 있었다.

예루살렘출신도 아니고 유대 땅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유월절 예루살렘 순례를 왔다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이십대 중반에 예수를 알게 되고, 삼십대 초반에 순교자가 된다. 이는 남들이 모르는 무엇인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만의 비밀병기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그만의 비밀병기가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는 그것을 설명해 준다. 55-56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스데반이 무어라 했는가? 보았다고 했다. 무엇을. 하늘이 열리고 인자(예수님)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 스데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그냥 죽은 것, 사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다.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을 죽은 자가 아닌 살아계신 자로 보았다. 그러니 돌에 맞아 죽게 되는 상황가운데서도 기죽지 않았고, 비겁하게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았고, 오히려 마지막 기도를 한다. 사도행전을 한 학기 강의한 적이 있었다. 스데반의 기도를 연구해보니, 두 마디의 짤막한 기도는 예수님께서 최후에 드린 기도와 맥을 같이한다. 이는 스데반의 긴 설교와 대조를 이룬다. 그 두 마디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이다. 이 기도는 초대교인들이 격을 박해와 위기 앞에서 견디어야 할 초연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해 주고 있다.

 

우리들 이야기

1.위기 앞에 흔들리는 신앙인가? 아니면 견고한 신앙인가?

사람이 당하는 위기는 많다. 다양하다. 대개는 위기를 만나면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라도 위기 앞에 흔들리지 않는 경우는 무엇인가를 보았거나, 무엇인가를 경험하였거나 이다. 그런 강력한 힘은 다름 아닌, 주님이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만나거나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런 예는 많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는 실망을 하고 각자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또는 박해와 수난을 피해 숨거나 도망을 갔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나고, 약속하신 성령을 영접한 이후에는 달랐다. 비겁한 겁쟁이가 아니라, 용감한 자가 되었고, 도망가는 자가 아니라. 날 잡아가시오, 나 여기 있소 하는 대담한 자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터닝 포인트는 무엇인가? 예수의 죽음과 다시 사심과 관계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다신 후 하나님께로 가시면서 하신말씀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들에게 위로의 하나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다시 사신 주님이 있었기에 오신 것이다.

 

, 우리들의 신앙이 흔들리는가? 다시 사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했거나 그런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거나 확신이 있다면 다르다.

 

2.부활의 신앙이란?

1)일어나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부활신앙이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의시소침에서 일어나는 것, 의욕상실에서 일어나는 것, 나태한 신앙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과중한 일로인해 링거를 맞고 있다고 하는 단톡에 소식이 올라왔다. 속해있는 회원들이 내일이 부활주일이니, 얼어나라고 격려를 한다. 그렇다 부활신앙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종 일어나는 것은 사망권세,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야 참다운 부활신앙이다. 스데반의 신앙은 이런 신앙이다. 그래서 돌을 던지는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2)바라보는 것이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우리들의 신앙이 일어날 수 있는 비법은 바라보았을 때, 보았을 때이다. 스데반이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시어 서 계시는 주님을 보았을 때, 가능했다. 그렇다, 부활신앙은 다름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상아계심을 보았을 때, 확신이 생길 때만 가능하다.

 

다시 일어나는 신앙을 회복하라, 부활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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