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의 권위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멀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세상은 점점 물질이 풍요로워져 간다. 그렇게 되면 종교, 종교인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 가끔 지역의 관청 행사에 참석을 해보면 종교인은 순위에서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종교 행사일 경우에는 다르지만. 언론을 통해 대선 후보가 자신의 종교와 다른 곳이라도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 이럴 때는 후보는 을이 되어 낮은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권력을 잡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도 권력의 힘은 엄청나다. 종교인이 권력을 잡은 자 앞에서 목소리를 낸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상 대단한 권력자 앞에서 종교인의 소리를 담대하게 낸 인물이 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이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데살로니가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시민들이 로마 통치 반대를 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진압 과정에서 황제의 장군 한 사람이 살해가 되었다. 화가 난 황제는 군인들에게 보복 명령을 내렸고, 무고한 시민 7000명이 희생 당하고야 진압되었다. 그 후 황제는 로마로 돌아왔다. 주일이 되어 황제는 예배 드리러 갔다.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성전 문을 가로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물었다. ‘왜 못 들어갑니까?’ 암브로시우스가 답한다. ‘황제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 학살했는데, 무슨 염치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못 들어갑니다.’ 그러자 황제가 ‘다윗 왕도 죄를 지었지 않았는가?’ 그러자 암브로시우스가 담대하게 말한다. ‘감히 황제가 다윗 왕을 흉내 내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황제께서도 다윗 왕처럼 회개를 하셔야지요.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결국 황제는 성전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 후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달게 여기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몇 개월 후 황제의 옷을 벗고,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참회를 했다. 그해 성탄절에 교회의 공식적인 사면을 얻은 후, 성 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황제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종교인 암브로시우스의 권위는, 교회 권위를 바탕에 둔 것이다. 교회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종교인의 권위는 힘을 잃어버린다. 교회의 권위는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함에 있고, 그 거룩함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위를 회복해야 할 때라 생각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어떤가? 정말로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가? 교회를 다니긴 다니지만,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자부심과 긍지도 없이 다니는 것은 아닌가? 각종 비리와 부정과 사회문제의 온상에 끼어 있는 것이 기독교인이 아닌가? 작금의 교회와 기독교는 바른 소리도 못 낼뿐더러, 무슨 소리를 내더라도 그 소리를 사람들이 믿어주고 인정해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당신이나 잘 하시요’ 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들에게 위정자들에게 무슨 소리를 한들 듣기나 하겠는가? 암부로시우스 같은 종교인이 그립다. 종교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세대가 그립다. 종교인의 말을 인정해주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가 그립다. 법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마찬가지로 신 앞에 인간은 평등하고 똑같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일 수 없다.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는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암부로시우스 주교와 데오도시우스 황제 둘 다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이셨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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