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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레인 신도회 고병국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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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페터레인 신도회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회심후 독일 모라바아교의 중심지인 헤른후트를 방문하고 1738916일에 런던에 도착한다. 그는 런던과 옥스퍼드 지역을 다니며 하루 평균 3번 설교하면서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의 길을 출발한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 전에 피터 뵐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설립된 페터레인 신도회에 재결합하였다. 이 신도회는 회원이 32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페터레인 신도회는 처음에는 모라비아교도, 메도디스트도 아닌 두 가지 요소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구성원들은 웨슬리형제 홀,잉함,킨친,허칭스,휫필드 등 옥스퍼드 메도디스트를 비롯한 영국 국교회 교인들과 좀 더 많은 수의 독일 모라비안교인들로 되었었다. 페터레인 신도회의 두 가지 규칙은 첫째는 매주 한번 모여서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상한 영혼을 치료받고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는 누구든지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진 신실한 사람이 이 모임에 연합하기를 원하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신도회는 매주 수요일 저녁 8시에 정기 모임을 갖고 찬양과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으며 서로 영적인 도움과 권면을 주고받았다. 매월 1회 애찬회를 갖고 매월 넷째 토요일에 중보기도회를 열었다. 이 신도회는 영국 국교회적인 요소와(잘 정돈된 조직과 효과적인 교육방법)모라비아교 요소(영적인 경험을 통한 역동성)가 종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페터레인 신도회는 56명의 회원에 8개의 반회(band)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여성은 단8명이고 여성반회는 2개뿐이었다.173911일 저녁에 약60명이 모인 페터레인 신도회의 정기 애찬회는 너무 은혜가 충만해 다음날 새벽3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날 애찬회는 신도회 거의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열중하고 손을 들고 찬송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들은 너무 큰 성령의 체험을 경험하였다. 이날의 광경은 마치 초대 교회가 탄생하던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일어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날 밤 성령의 강한 역사를 흡족하게 체험한 페터레인 신도회는 같은 달 7일에 비슷한 애찬회를 다시 가졌다. 그날 애찬회에서도 그들은 역시 성령의 강한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 날의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웨슬리는 일기에 기록하였다.“기도를 계속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나 강하게 역사하여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서 큰 소리를 질렀으며, 많은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는 조금 정신을 차렸을 때에 주님의 권세 있는 임재에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모두 한 목소리로 우리가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 합니다라고 외쳤다.”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이성과 지성으로 굳게 무장한 웨슬리가 이렇게 신비한 성령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 것은 모라비아교 신앙의 영향이었다. 이런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는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이 불붙어가는 동력이 되었다.173911일 이후 웨슬리와 메도디스트 동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임을 통해 성령 충만을 위해 통성기도와 찬양을 드렸다.

 

 페터레인 신도회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모라비아교적 요소가 더욱 강해지게 되었고, 그러다가 필립 몰터라는 모라비아교 목사가 정적주의라는 정체가 이상한 신비주의를 신도회에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이 웨슬리와 갈등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 몰터가 가지고 온 정적주의란, 첫째 칭의의 은혜를 얻어 완전한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는 어떤 은혜 받는 방편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둘째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정한 믿음을 얻어 구원의 확신을 얻을 때까지 오로지 예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아 기다려야지 어떤 종류의 선행도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성만찬이 회심을 일으키는 의식, 즉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으므로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는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넷째 믿음에는 정도가 없다고 하였다. 믿음이 전혀 없든지 아니면 완전한 믿음이든지 두 종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몰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면서 주일에 심지어 교회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조용한 형제들(모라비아교인 중에서 정적주의자)과 반대로 오히려 진정한 믿음을 얻고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은혜의 방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모든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웨슬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도회는 점점 몰터파와 웨슬리파로 분열되어 갔고, 심지어 증오심까지 표출되면서 분열을 가중시켰다. 결국 신도회는 분열되었다. 웨슬리를 따르는 신도 회원 18명이 따라나섰다. 이단적 신비주의인 정적주의와 결별한 웨슬리를 따르는 회원들은 17404월에 페터레인 거리의 건너편 파운더리(Foundry-옛 대포를 만드는 무기 공장 터)에 독립된 신도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 파운더리 신도회는 영국국교회나 모리비아교에 매이지 않는 명실 공히 순수한 메도디스트 신도회로 세워지게 된다. 페테레인 신도회의 약2년 동안 경험은 웨슬리와 메도디스트에 있어서 값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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